Sunday, August 23, 2015

대마초가 불법이 된 이유 - 슬픈 현대사의 단면




이 글은 위의 마리화나 다큐멘타리를 번역한 글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있으나 기록 외의 사건도 있을수 있는 점 서두에 알려 드립니다.

근대 소수 자본가들의 세계 재편의 시작인 1, 2차 세계 대전은 간단히 말해 세계 연료 시장을 석탄에서 석유로 옮겨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산업을 석유 기반으로 다시 건설하기위해 일으킨 말로 이루 형언할수없는 참혹한 연극이였다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전쟁 이후  금융 재벌이 뒤를 받혀주고 석유와 화학, 제약, 섬유, 그리고 벌목및 제지 회사들의 로비는 정치인들의 동의하에 그들만의 판 짜기의 결과물로 지금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에 이르렀습니다.

1930년을 전후하여 미국에선 공업의 원료를 농업에서 얻으려는 케멀지(CHEMURGY)가 산업 정책으로 부상했는데 대마가 그 정책의 중심에 있었으나 생산 과정에서 수작업을 거처야하는 문제점으로 난관에 봉착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던 중 디코티케이터(DECORTICATOR)가 발명되어 그 수작업을 대신할수 있게되자 팝퓰러 메카닉스 메거진(Popular Mechanics Magazine)에서는 앞으로 세계 산업을 움직일 발명중 하나로 알렸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이 발명에대한 소식을 환영한 것은 아니였습니다.

핑크 저널리즘의 대표 인물이자 언론 재벌이였던 윌리암 랜돌프 허스트(W. R. Hearst)는 장시 벌목을 위해 방대한 임야를 매입한 상태였으며 종이 업체들에 많은 자금을 투자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그로부터 생산된 종이로 자신의 신문과 잡지를 출판하여 수익을 배가 시킬 계산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대마 재배로부터 생산되는 종이는 가격면에서 경쟁이되지 않았기에 벌목과 종이 생산에대한 그의 투자는 실패로 돌아갈 것이 불보듯 뻔했습니다.


그 시기에 또 다른 부호중에 대마초 대량 재배로 직격탄을 받을수있는 부호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그 유명한 듀폰(DUPONT)사의 창업자인 라몬 듀폰(Lammot Dupont)이였습니다. 그는 당시 석유로부터 만들어낼수있는 각종 화학물 특허를 방대하게 사들여 각종 공업용, 생활용품을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지금도 우리의 생활에서 방대하게 사용되고있는 생활, 공업용품, 심지어는 식료품까지 이 듀폰사에서 만들어졌거나 듀폰사의 특허를 이용해 만들어진 제품들 입니다. 이런 그에게 대마초는 자사의 이윤 창출에 가시같은 존재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듀폰과 허스트, 그 둘은 그들의 엄청난 투자가 대마초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는것 외에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거대 자본가이자 은행가인 앤드류 멜런(Andrew Mellon)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고있었다는 것입니다. 앤드류 멜런은 당시 걸프(Gulf) 석유회사의 소유주로 걸프 오일은 거대 석유 자본의 7자매로 불리우던 일곱 회사중 하나였습니다. 대마 선업의 발전은 그들이 계획한 산업 기반에 걸림돌이 될게 분명했습니다. 석유 산업에 비해 대마 산업이 갖는 장점 즉 값싸고 친 환경적 이점을 갖고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또한 그 당시 발전의 첫발을 내딛기 시작한 제약 회사도 대마초는 그들의 적이 였습니다. 그 당시 제약 회사들은 당대의 또 다른 석유 재벌 존 록커펠러(John D. Rockefeller)와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의 투자하에 있었고 그들은 대마초를 포함한 모든 자연 약초를 화학 약품으로 전면 대체할 계획이였습니다.

록커펠라(Rockefeller) 역시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의 소유주였고 세계 시장 기반 구축에 착수한 상태였습니다. 세계 산업은 석유 채굴을 기반으로한 공업 연료, 섬유 화학, 플라스틱, 제약 등으로 구축되는데, 이 모두는 대마산업에서 얻을수 있는 장점들로, 바로 그들의 단점이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앤드류 멜런은 그 당시 미국의 재무장관 (Secretary of Treasury)을 지내고 있었고 그 당시 그의 미래 사위 해리 앤슬링거 (Harry Anslinger)를 연방 마약 관리국 (FBN: Federal Bureau of Narcotics)의 수장으로 고용하여 대마초를 산업화의 역사에서 지워 버릴것을 명령합니다. 해리 앤슬링거는 바로 전 주류 판매 금지법을 합법화하게 한 인물로 유명합니다. 주류 판매가 합법화 되면서 재무장관의  뒷받침하에 그의 타겟은 대마 산업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당시까지 공업부분에서 대마초는 많은 이들에게 각광 받고 미래를 약속하는 사업으로 추앙받고 있었습니다. 허나 미디어 모굴 랜돌프 허스트의 아이디어로 대마초는 멕시코 이주자들이 피우는 마약 '마리화나'로 둔갑하게 됩니다. 마리화나라는 이름은 그 당시 미국인들에겐 생소한 대마초의 별명이였으나 허스트는 이 이름을 멕시코인들과 흑인들에 대한 인종 차별적 요소를 감미하여 범죄, 폭력, 문란함, 성범죄, 살인 등의 아이콘 '초록 괴물'로 재탄생 시킵니다.

모든 미디어 캠페인에 힘입어 대마초 금지 법안의 상정에 이르게 되는데, 대마초 흡연 금지 법안이 아닌 산업용 대마 재배를 포함한 대마초 산업의 근간을 잘라 버리는 법을 상정하기에 이르면서 미 국회는 대마초 흡연과 대마초 산업의 차이에 대한 정보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대마초 산업 전면을 금지하는 법안 상정에 찬성하고, 그로인해 미국은 1937년 대마초에 대한 대중 토론이나 과학적 근거없이 마리화나 금지법은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합법화 되기에 이릅니다. 대마초에 대한 전쟁의 역사가 이로서 시작 되었으며 바로 범법자 색출이 시작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모든 사람이 그 법안에 찬성한 것은 아니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당시 인기 가도를 달리던 뉴욕 시장 피오렐로 라 구아디아 (Fiorello La Guardia)였습니다. 그는 대마초의 이점을 연구 하도록하는 법안에 서명했으며 31명의 학자들을 고용해 마리화나 흡연의 결과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실험을 5년간에 걸쳐 실시 했습니다. 그리고, 1944년 연구 보고서가 출간 됐는데 놀라운 결과를 보여 주기에 이릅니다. 라 구아디아 보고서에 따르면, 마리화나 흡연이 미치는 영향은 정부에서 주장하고 선전해온 정반대의 입장을 표명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앤슬링거는 격노하여 연구의 오류를 주장하며 보고서를 다시 거둬들여 하나도 남김없이 파기할것을 명령합니다.

단단히 화가난 앤슬링거는 여기에 그치지않고 대마초 금지 선전에 더욱 박차를 가하며 대마초를 헤로인, 코케인같이 중독성이 강하고 해가되는 마약들과 같이 1급 마약으로 취급해 버립니다. 그리고 마리화나는 마약 중독으로 가는 관문이며 반사회적, 파괴적으로 구제할수 없는 인간을 만드는 악마로 치부되어 집니다. 1956년이후 미국은 마리화나 금지법을 더욱 강화하여 적은 량을 소지하더라도 중형에 쳐해지고 미주리 주는 재범시 종신형에까지 쳐해질수 있는 끔직한 법령을 시행하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미국에서 대마초를 철저히 몰아내는데 성공한 앤스링거는 그 표적을 세계로 돌리고 1961년 UN에서 전세계 마약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법안을 발의할 것을 제안하고 금지 마약 품목에 대마초를 포함시키는데 성공합니다. 그로부터 마리화나는 세계지도에서 하나 둘 자취를 감추게 되는것입니다.

이로써 석유화학 산업(Petrochemical Industry) 자본가들은 그들의 이윤을 극대화 할수있게 되었으며 그댓가를 지금 우리가 치루고 있는것입니다. 환경 파괴와 지구 온난화, 부의 불균형 그에따른 많은 폐해와 부조리를 낳게 되었습니다.

150년전 만 하더라도 자연적으로 땅을 경작해서 우리 일상의 모든 부분을 (식량은 문론 섬유, 기름, 휘발유. 약재등) 충족시켜 왔으나 현대는 석유를 중심으로한 화학약품, 화학연료, 화학비료들을 사용하는 농경으로 바뀌어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생활이 인공 화학화가 진행되었습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히피 혁명은 젋은이들의 마리화나 사용의 폭발적 증가를 가져왔으며 그로인한 신 자유주의와 평화운동이 미 전역은 문론 세계적으로 정치적, 사회적 흐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것은 곳바로 마리화나 합법화 운동으로 이어집니다. 마리화나가 정부가 선전해오던것처럼 퇴폐적이며 부정적이지만 않다는것을 다시 알게된 것입니다.

그 시기에 캘리포니아의 팔로 알토(Palo Alto)에서는 마리화나가 뇌에 끼치는 영향을 연구하는데 그 결과는 정부의 선전 내용과 사뭇 달랐습니다. 그리고 배트남 전쟁당시 군인들 사이에 마리화나 흡연이 성행 하였고 그로인해 전쟁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폭력성을 많이 완화시킨 것으로 알려지면서 각국 연구진들은 마리화나에 대한 새로운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많은 할리우드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마리화나를 합법화 하자는 목소리가 커져갑니다.

이런 신 자유주의적 사상은 당시 보수 진영엔 심각한 골칫거리가 아닐수 없었는데 그 시기 미 대통령에 당선된 보수 진영의 리차드 닉슨(Richard Nixon)은 이런 신 자유주의의 억압을 위해 첫번째로 내세운 정책이 마약과의 전쟁이였습니다. 그는 1968년 마리화나에대한 새로운 연구를 지시하는데 그가 예상한것과 정 반대의 결과가 나오자 보고서를 읽지도 않은채 휴지통에 던져버립니다. 그는 앤스링거가 그랬던것 처럼 연구결과를 무효화 시키고 마리화나의 1급 마약 법안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합니다. 그는 약용으로서의 마리화나 사용도 강력히 금지합니다.

그러나 미국의 여러 보고서에의해 마리화나의 약용으로서의 효과가 밝혀지면서 1급 마약 법안의 허구성을 지적하게 되고 영국 또한 베로네스 우튼(Beronnes Wooton)이란 범죄 학자이자 사회 학자에 의해 진행된 마리화나 연구 보고서는 마리화나의 의학적 가치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결과를 낳게됩니다. 그러나 닉슨 대통령은 보고서를 인정하기는 커녕 DEA(Drug Enforcement Administration)라는 강력한 마약 퇴치 조직을 창설하게 합니다. DEA는 그로부터 마약 퇴치라는 명목하에 소수계 억압과 감시, 신자유주의의 통제를 단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후 마약과의 전쟁은 현재까지 계속 되어 오면서 긍정적인 효과 보다 너무도 많은 폐해를 나았습니다. 마약으로 인한 사망과 국민건강 저하와 그의 단속으로 인한 천문학적 세금의 낭비는 계선 되기는 커녕 교도소 수감자의 수가 폭증했습니다. 더우기 소수계의 비율은 비정상적이라리 만큼 많습니다. 특히 단순 대마초 소지로 인한 어린 수감자들도 너무도 많습니다.

또한 2000년 초반부터 시작된 처방전 약의 남용 즉 오피오이드 계열의 약물 남용은 미국을 너어 세계적 제앙으로 다가 왔으나 이는 단속과 법 집행의 대상에서 제외 되기는 커녕 거대 제약 회사에 의해 처방이 권장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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